전쟁발발, 예비군 - 예비역들이라면 누구나 가슴먹먹해질 이야기

2013. 2. 5. 01:02프로메테우스/나만의 생각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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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다시 한 번 전쟁이 일어난다면?

난 2년 2개월의 군생활을 마친 예비역이다. 강원도 고성에서, 봄날의 따스함마저도 한번 바람에 모두 사라지던, 그리고 6월에도 땅을 파면 눈이 나오던 그 신통방통한 곳에서 비록 총질보다는 삽질을 더 많이했던 나이지만, 그래도 전쟁이 나면 바로 그 전장의 최전선에 서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있어서는 안되겠지만, 만약 대한민국에서 다시 한 번 전쟁이 더 일어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마음 속의 가정이었지만, 아래의 인터넷 소설에 난 아무래도 "자원입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나고, 내가 전쟁에 소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것이 결국 사람의 머리수가 필요한 것이고, 나라를 지키려면 그 머리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테니까 말이다.

예비역이라면 가슴이 먹먹해질 글이다. 일간베스트저장소에 volcanic님이 쓴 글에는 사진까지 함께 첨부되어 있어서 더욱 더 볼만했지만, 사진까지 가져오는 건 무리고, 최대한 수정없이 맞춤법과 띄어쓰기만을 수정하여 전재한다. 그 가슴 먹먹함을 함께 느껴보기를...

※ 원작자의 사전 허락을 구하지 못한 부분을 사과드리며, 문제가 생길 시에는 전재 부분에 대해서 삭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전쟁발발, 예비군 Ep. 1~9 / 일간베스트저장소 volcanic님 작성글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GmAa6

Ep. 1

금요일에 신나게 친구들과 술 한 잔하고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도 모른 채 씻지도 않고 잠들었다가, 비오는 토요일 느즈막히 오후 3시 좀 넘어서 일어나 늘 하던대로 발가락으로 컴퓨터 본체를 켜고, 화장실 갔다가 물 한 잔 하면서 TV를 켜는데, '긴급방송' 으로 갑자기 자막이 막 오르내리면서 다급한 아나운서의 멘트.


"실제상황입니다. 현 시간부,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예비군 장병 여러분들은 즉시 집결지를 확인하고, 해당 부대로 지정된 시간 내에 입소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다른 채널 돌려보니 다 엇비슷한 내용. 
그제서야 밖에서 들리는 차량들 클락션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창문 열고 보니 도로에는 짐을 가득 실은 차들로 꽉 차 있고, 사람들마다 차 빼라고 욕에 싸움까지.

그 때 마침 들리는 사이렌 소리. 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앵~~~~~~~~

"여러분 이것은 실제상황입니다. 군경의 지시에 따라 안전하고 신속하게 대피하시길 바랍니다. 예비군, 향토예비군 여러분들은 정해진 시간 내에 편성된 부대로 입소해 주십시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둘러보니, 우산도 없이 차 버리고 간편한 짐만 가지고 가는 사람들. 애들 손 잡고 가는 엄마들, 머리에 보따리 이고 가는 할머니. 무슨 짐이 그렇게 많은지 캐리어 2개를 꾸역꾸역 트렁크에서 꺼내서 "이거 다 가져갈거란 말야!! 못버려!!" 하는 김치女. "아 몰라 씨x, 너 알아서 해" 하고 가버리는 김치男. X반도 입고 호루라기 불고 경광봉 흔들면서 사람들 안내하는 군인, 경찰.

놀래서 친구, 가족한테 전화하려고 휴대폰 보니 망 과부하로 인해 서비스 불가. 인터넷 역시 망 과부하. 패닉에 빠져 멍하니 TV만 보고있다가 실제 북괴군이 넘어오고, 우리나라 육군 전차랑 전투기 뜨는거 나오고.

문 열고 방금이라도 북괴군이 들이닥칠 것 같은 마음에 걱정하면서, 도망을 갈까, 예비군 부대로 가야 하나 결정도 못하고 방 안에서 왔다 갔다. 머리속에서는 온통 '시발시발시발 어떻게 하지' '도망갈까' 하는 마음에 다시 밖을 보니,

밖에서는 사람들 존나 뛰어다니면서 피난 행렬 이어지고 있고, 어쩌다 그랬는지 벌써 부모잃은 꼬맹이는 주저앉아 울고 있고, 아까 김치女는 혼자 캐리어 2개 질질 끌고 인상 구길대로 구기며 사람들하고 부딪히면서 저 멀리 걸어가고 있고. 갑자기 하늘이 막 시끄러워서 보니 헬기랑 전투기 막 날아다니고. 사이렌은 계속 울리고.

'...엄마...어떻게 하지...전화좀 돼라 제발...' 하면서 휴대폰으로 계속 엄마한테 전화는 거는데 서비스 불가. 카톡으로 메세지 보내도 '전송실패'

물끄러미 TV보고 있는데, 계속 사람 죽어나가는 영상에 예비군들은 해당 부대로 입소하라고 계속 자막 띄우고 난리. 그러다 중간에 이명박 대통령 계엄령, 동원령 선포방송. 오바마 대통령 뭐라 발표하는거 들리고. "대한민국을 도울것이며, 한국의 국민을 수호할 것입니다"

전화기 손에 쥔 채로 서서 멍하니 tv 보고 있다가.

'ㅅㅂ그래, 전쟁나면 군대가 제일 안전하다던데. 어차피 예비군이면 곧장 투입되진 않겠지. 안가면 안가는 대로 큰일이고. 근데, 나 어디로 가야되지?'

병력동원소집통지서 찾으려고 책상서랍 3, 4개 뒤집어엎다가 구석에 짱박히고 노래진 종이 겨우 발견. 00학교로 M+ OO 시까지. 찾아서 다행인지, 아니면 마음이 복잡해서인지 모를 한숨이 나오고. 옷장 뒤져서 역시 구석에 좀약 냄새가 벤 구겨진 군복, 관리 안해서 뽀얗게 먼지 앉은 군화 꺼내는데.

띵동띵동.

누군가 다급하게 벨 누르는 소리.

문 열어보니 보따리 몇 개 들고 있는 굳은 표정의 아버지와 눈물 고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엄마. 손에 들린 군복이랑 군화를 보더니 대성통곡.

"언제 여기까자 왔어 엄마.... 피난 간 줄 알았더니.."

"전화도 안되고.....걱정돼서 왔지.............................."

"...나.....괜찮아...나라 지켜야지...엄ㅁ...."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엄마 끌어안고 엉엉.

아버지는 뒤돌아서 눈물닦고 엄마 일으키더니, "사내가 나라 지키러 간다는데 울기는.." 하고 말하다 나 보고 뒤돌아서 눈물닦고, "...잘...무사히 돌아와라" 하면서 주소 적힌 종이 하나 손에 쥐어주고 엄마 다독이면서 다시 피난길로.

착찹한 마음으로 부모님 뒷모습 보면서 있다가 군복 대충 입고, 거울 보는데,

'부모님 피난 잘 가고 계실까.. 나쁜놈들이 등쳐먹진 않을까..'
'짝사랑하던 걔는 어떻게 됐을까...'
'전 여친 보고싶다...'
'친구새끼들은 어떻게 된거야...죽지마라 자식들아.....혹시 전쟁터에서 만나진 않을까....'

그러다가 갑자기 문득 든 생각.

'나 죽으면 어떻게 하지..'

죽은 후 내 영전 앞에서 통곡하는 엄마 얼굴이 스쳐지나가면서 괜히 울컥. 멍하니 거울 보다가, 혼자 따귀 때리면서 '내가 죽긴 왜 죽어' 하고 마음 다잡고. 억지로 센 척, 웃으면서.

핸드폰 안 터질거 알지만 그래도 연락처랑 찍은 사진들 많으니까 챙기고, 펜이랑 메모지 같은 것도 왠지 모르게 필요할 것 같아 챙기고, 밴드랑 후시딘같은것도 챙기고. 대충 꾸역꾸역 가방에 쑤셔넣고 집 나서려는데, 책상에 놓인 가족사진 보고 폭풍눈물. 사진첩 열어서 건빵주머니에 사진 쑤셔넣고 집 밖으로.

밖에 나가니 집에서 보던 거에 비해 몇 배나 더 난장판. 이불보따리, 물통, 아이스박스, 슬리퍼.. 가릴 것 없이 다 버려져 있고, 옷가지들 굴러다니고. 2돈반, 4/5톤 트럭 부릉대면서 지나다니고. 소집장소 찾아서 막 걸어가고 있는데 지나가던 군인이 그거 보더니 어느 학교로 가냐고. 00학교 간다 하니, 저 차 타라고 하면서 손가락질.

쳐다보니 2돈 반에 이미 나 말고 다른 예비군들 표정 썩어서 꾸역꾸역 앉아있네. 안경 여드름 뚱땡이, 어좁이, 담배 존나 피면서 침뱉고 욕하고 있는 생양아치. 스마트폰 만지면서 '전화가 안되네..' 하다가 갑자기 혼자 막 우는 새키까지. 그렇게 다들 말없이 집결지로 가는데.


Ep. 2

2돈반에 다들 꽉꽉 들어차서 앉아서 도로를 달려 00학교로 가는 길. 아무도 말 한 마디 하지않고 도로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매일 봐오던 도로인데. 매일 걷던 도로인데. 확 변했네.'

그렇게 사고싶어 안달이던 차를 문도 열어놓은 채로 버려버리고 뛰어가는 사람들. 아까 봤던 아이의 엄마인지 아이의 이름을 소리질러 부르며 돌아다니는 아줌마. 어디로 가야하는지 잘 알지 못한 채 사람들 많이 가는 방향으로 무작정 뛰는 사람들. 호루라기를 끊임없이 불고, 어디론가 무전을 계속 치는 경찰, 군인들. 멀뚱멀뚱 주변만 보다가 가끔 2돈반에서 올라오는 역한 매연 연기에 기침하면서 주변을 보다보니, 어느 새 멀어지는 사람들, 건물들.

조금씩 뿌려대는 비를 맞으며, 멀어져가는 건물들만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문득 입대하는 날 생각도 나고. 어디에 있는 부대로 가는지 건빵주머니에 사진이랑 같이 넣어둔 소집통지서 꺼내보는데, 그 와중에 "...씨X...하필이면 왜 지금 전쟁이 터지고 X랄이야...아오..." 담배피던 양아치가 침뱉으면서 한 마디 던지고. 그걸 시작으로 서로 어디 부대 나왔는지, 보직이 뭐였는지, 예비군 몇년차인지 얘기하고.

군복 단추가 안채워질 정도로 살 찐 안경 여드름 돼지, 어디서 구했는지 지퍼달린 사제 전투화 신고 온 양아치, 친구한테 빌린 전투복 입고 와서 어깨가 남아도는 어좁이. '이 사람들이...전쟁터에서 바로 옆에 있을 사람들...'

누구하나 무시하거나 비웃지 않고 서로 물어보고, 답하고. 

"낮은 년차수부터 전방으로 간다던데..몇 년 차에요..?"
"...총이나 탄띠 이런거 부족하다고 하던데..다 줄 수 있나.."
"미국..지금 한참 다 끌고 오고 있겠죠?"
"다들 군번줄은 가지고 왔어요?, 난 혹시 몰라서 가지고 왔는데..다시 주나..?"
"아저씨, 부대마크 구형이네, 신형으로 바꾸지, 눈에 잘 띌텐데..아 어차피 부대 들어가면 부대마크 다시 주려나?"

하면서 정작 확실한 것 하나 없고, 온통 자기가 믿고 싶은 '카더라' 이야기들만 하다보니 어느새 00학교 도착.

학교 도착하고 보니. 다행히 비는 그쳤고. 미리 도착한 다른 예비군들은 너도나도 담배 한 개피씩.. 운동장이 안개가 낀 것 마냥 담배연기 자욱하고, 수백명이나 되는 예비군이 죄다 ㅅㅂ거리면서 터지지도 않는 휴대폰 만지작거리거나,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이랑 모여서 현역시절 줏어들은, 혹은 신문사에서 비교해놓은 우리나라+미국 vs 북한 국방력, 장비, 병력 분석, 중국의 개입여부, 러시아의 입장..등등 돌고 도는 이야기들.

그렇게 다들 웅성웅성거리고 있는데 부사관 한 명이 조회대 위로 올라가서 확성기 잡고서, 

"예비군 장병! 정렬합니다! 지금은 전시 상황이고, 장병들은 동원지정자라 KK사단에 징집됩니다. 최종 도착지는 KK사단입니다."

방금전까지 웅성거리던 예비군들 갑자기 조용해지고, 무의식적인지..자연스럽게 오와 열 맞춰서 줄 서고. 위장크림으로 얼굴에 온통 떡칠한 간부랑 현역이 같이 명단들고 돌아다니면서 예비군들 체크하고.

그렇게 잠깐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운동장에 등장한 버스, 오톤 트럭. 앞 줄부터 순서대로 탑승. 다들 도살장에 끌려가는 표정.

그렇게 타던 중 몇몇 예비군들은 간부들한테 가서,

"몸이 안 좋은데..얼마 전에 수..수술을 해서.."
"....저....저는 결혼해서 애가 있어요..어머니도.."
"....깜빡 하고 약을 안가져왔는데..잠깐 갔다오면 안될까요.."

온 걸 후회하는 건지, 아니면 '나름 정당하게' 빠지고 싶어서인지...

문득 '나도 어디 안 좋은 데 없나..나도 집에 가고 싶은데..' 그런데 내 사지육신은 아픈 데 하나 없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켜봤지만 결국 모두 버스에 탑승.

그 와중에 질질 울면서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죽기 싫어요" 하는 예비군도 보이지만, 역시나 질질 끌려가다시피 차량 탑승. "나 하나 빠진다고 알겠어요..? 그러지 말고..좀 봐주세요.." 하던 돈 많은 부잣집 아들내미 비웃음만 당하고 질질질 끌려 탑승. 

버스, 트럭 출발하는데 다들 약속이나 한 듯 자포자기하고 담배 꺼내물다가, "이 새끼들이 담배 안 꺼?" 라는 간부 말에 지려버리고. 일어나자마자 물 한 컵 마시고, 아무것도 못 먹고 움직이다보니 지쳐서 어느새 잠들었다가, 버스 서는 느낌에 눈을 떠 보니, 어느새 KK 사단.

다들 눈 비비면서 버스에서 내리니 역시나 얼굴에 온통 위장크림 범벅에 탄창삽입한 K-2 들고있는 간부랑 현역 대기. 연병장에는 치장창고에서 꺼내온 K-2와 방독면, 탄띠, 철모,총검, X반도가 쫙 나열되어있고, 마지막에 실탄 들어간 탄창 지급. 잠 덜 깬 예비군 어리버리하다가 고함지르는 간부들한테 이끌려 치장물자 보급.

다들 장구류 몸에 맞춰서 조절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탕!!!!!!!!!!!" 하는 총알 발사소리. 다들 순간적으로 배 깔고 엎드리고, 알고보니 아까 2돈반 타고 왔던 어좁이가 실수로 방아쇠를 당겨서 하늘로 쏴버린 거고.. 간부 다가와서 총 뺏고 푸쉬업, 오리걸음으로 기합주고..

그거 보고 다른 예비군들도 바짝 긴장해서 서로 총구 방향 조심하고, 안전에 놓였는지, 가스마개는 있는지, 가스마개가 중으로 맞춰져 있는지 확인, 노리쇠 힌지 고정 잘 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 확인.

장구류 다 받고 각 보병, 포병 연대별로 정렬. 사단장이 나와 KK사단이 맡은 작전지역과 임무수행에 관해서 간단하게 설명.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이해하는 사람 하나 없고, 'ㅅㅂ 뭐 어쩌라는거지, 그냥 시키는대로 까면 되겠지 뭐' 라는 표정.

포병연대 소속으로 내무실 배정받아 들어가니, 옛날 그 옛적 내무실(생활관). 

'아무리 군대가 좋아지고 했다지만 예비군 숙소는 거기서 거기지..'

같은 생활관 배정받은 사람들이랑 인사하고, 아까처럼 어디서 군복무했는지, 몇년차인지..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다' 라면서 머리를 흔들고, 그 와중에도 서로 총기는 놓지않고 꼭 가지고 있고.. (다들 본능적으로 '총기만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윽고 전체 방송으로 '예비군 1번, 2번 생활관 식사' 라고 안내방송 나오고, 시간이 흘러 우리 생활관 식사 시간.. 기름때가 구석마다 낀 식판들고, 숟가락 들고, 총기들고(그렇게 귀찮고 무거웠던 총인데 다들 끔찍하게 챙기고 다닌다.) 밥먹으러 식당으로. 식단은 역시나 똥국에 깍두기 4, 5점, 무슨 고기로 만들어졌는지 모를 고기반찬, 8장 들어있는 포장 김. 먹어도 먹어도 배가 안 부른 신기한 떡진 밥까지. 완벽한 현역시절 먹었던 식단.

다들 먹는둥 마는둥. 밖에 나오니 이미 저녁시간이 많이 늦어져 등화관제. 현역들은 이 와중에도 위장 떡칠에 피곤한 다리를 질질 끌고 근무교대. 자세히 보니 역시 한창 상기되어있고 긴장된 표정.

'하긴, 쟤들이나 나나 전쟁은 처음이지....' 하는 마음에 왠지 먹먹해지고, 생활관 들어오니 다들 반쯤 잠든 상태. 현역 애들이 들어와서 생활관 인원, 이름, 주특기번호 다시 재확인.

그런가보다..하고 피곤해서 누워있는데 갑자기 나오는 방송. 

"오늘 점호는 방송점호로 대체한다. 여러분은 이제부터 KK사단 소속으로 현역과 함께 작전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자세한 작전사항은 해당 중대장 및 소대장에게 전달받을 것이며, 예비군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한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길 바란다. 금일 몸이 좋지 않거나, 환자는 지금 즉시 간부들에게 이야기하고, 간부들은 취합하여 지휘통제실로 전달할 것. 이상."

방송 끝나자마자 복도가 시끌시끌 웅성웅성. '저렇게 환자가 많았나'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순간 복도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간부의 목소리.

"군의관이 보고 꾀병, 혹은 자해의 흔적이 나올 시. 군법으로 엄중히 책임을 묻겠다."

순간 조용해지는 복도, 간간히 '시X' 이라고 나긋히 누군가 욕설을 하고, 결국 '진짜 환자' 몇 명만 생긴 것도 색깔도 똑같은 알약 처방받고, 중한 환자 한 명 없이 조용히 다들 잠자리에 들고..

징집 첫 날 밤. 다들 뒤척뒤척. 더 이상 맡고싶지 않았던 곰팡내나는 모포를 뒤집어쓰고 우는 사람도 있고, 간간히 들리는 한숨소리. 옆 사람과 '어떻게 될까요' 하면서 기약없는 시나리오를 짜는 사람도 있고.

오늘 하루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어떤 사람들을 봤는지 생각하다가 잠에 든다.. 이게 다 꿈이고, 눈뜨면 집이었으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어제 술 마셨던 친구들과 해장국을 먹었으면...


Ep. 3

"기상!! 기상!!"

'...아 ㅅㅂ꿈이 아니었구나'

몇 번을 자다깨다 겨우 잠든거 같은데. 현역, 간부가 뛰어다니면서 생활관 예비군들 죄다 깨우고 있네. 생활관 문은 전부 활짝 열면서 다니고, 반쯤 잠든 예비군 깨우고.. 역시 너나 할 것 없이 ㅅㅂ거리면서 투덜거리는데, 그 중 한 명이 불 켜려고 "이거 스위치 어디있어..." 하는 순간, 복도에서 "불 켜지 마!!!!" 하고 소리치는 간부.

옆에 전자 손목시계 가져온 사람 시계 보니 새벽 4시. 아직 밖은 어둑어둑. '....왜 벌써.....깨웠.....'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컴컴한 생활관에서 누군가 '들으라는 듯' 하는 불평. "아니 뭐 씨X 지금 몇신데 깨워! 6시가 원래 기상 아냐!?!?"

그 소리 듣고 복도 지나던 간부가 발걸음 멈추고 생활관 문 걷어차면서 들어오고. 

"...어떤새끼야"

하면서 들고있는 야전 손전등으로 소리 난 쪽 얼굴 비추는데 다 조용해지고 아무도 말 안하고.. 간부는 악이 받칠대로 받친 듯, "이새끼들아, 지금 전시상황인거 몰라!? 지금 잠이 중요해!?" 

그 소리 듣고 나서야 잠이 확 깨서 상황파악. '왜 깨운거지, 밀렸나? 도망가야 하나? 후퇴? 뭐지? 어떻게 되는거지?' 하면서, 본능적으로 k-2 더듬거리면서 찾고.

그 때 현역이 들어오면서 던지다시피 주는 야전 손전등과 위장크림. "지금부터 전원 위장 실시한다. 어두워서 잘 안보일테니 2인 1조로 서로 손전등 비춰주면서 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불은 절대 켜지 않는다. 5분내로 완료한다. 실시."

크레파스 냄새나는 위장크림 보고 있으니 한숨만 나오고, 옆 사람은 덜덜 떨면서 손가락으로 위장 크림만 만지작 만지작.

"..얼굴...대 봐요..."

그렇게 서로 얼굴에 빨간색 불 비춰 가면서 치덕치덕. 나중에는 잘 안발라지니까 아예 크림 손가락으로 파내서 뭉쳐서 얼굴에 치덕치덕. 옆사람, 여드름이 많은지 잘 보이진 않지만 뭔가 울퉁불퉁한게 만져지고.

그 와중에도 "아..피부 안좋아지는데....X같네...." 하는 소리.

'....병신같은 놈이...뒤질수도 있는데 저 지랄이네...' 하고 생각하는데

"지금부터 호명하는 인원은 군장, 장비 챙겨서 복도로 나온다..."

다들 갑자기 숨소리도 안내고 조용해지고. K-2 총열덮개만 만지작 만지작... 이름 불려서 나온 사람은 2열 종대로 복도에 쭉 서있고..다들 긴장된 표정..

"....이상 인원, 앞 현역을 따라간다."

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 군화 소리가 멀어져 가고, 

"다음....."

또 한참 이름 불리는데 거기 내 이름도 불리고. 심호흡 크게 한 번 하고 장비 챙겨서 밖으로 나갔는데 복도에 셀로판지 붙인 녹색 등만 하나 켜져있고. 창고에서 몇 년간 묵은 곰팡내 나는 군장과 검은 형체로만 보이는 예비군들.. 


".....이상 앞 현역을 따라간다."

그렇게 가려고 하는데, "...우리 어디로 가는겁니까?" 발길 멈추고 묻는 예비군. 다른 예비군도 모두 멈추고 간부만 쳐다보고. "...우리 사단 포병 대대의 작전지역으로 간다. 자세한 얘기는 해당 대대장에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어깨 밀면서 예비군 앞으로 보내고.

복도를 걸어 밖으로 나오니, 여름이라도 역시 군부대는 춥고...갑자기 찬 공기를 마셔서 그런가 배도 살살 아픈 것 같고..그런데 화장실은 가기 싫고.. 그렇게 다 나오니 저 멀리 연병장에서 2돈 반 트럭 불 켜지고, 서둘러 탑승하라는 현역.

차에 오르는데, 잠이 덜 깼는지 올라타다 방탄 떨구고, 수통 떨구고..가지가지 하는 예비군. 그 와중에 몇몇은 살쪄서 군복 바지도 '뽷' 하면서 가랑이 터지고.. 그런데 아무도 웃지도 않고...

차 출발할 무렵, 차량 선탑자 와서, "졸지 않도록 하고, 담배 피우다간 다 죽을수도 있으니 피지 마라" 싸가지 없는 말투로 말하고 자리 올라타더니 곧 차량 출발.

다들 그렇게 사단 벗어나는데, 방탄에 나뭇가지 파바바바바바바박 치고 지나가고.. 얼빵하게 정신놓고있다가 못 피한 예비군은 뒷목이랑 얼굴 긁히고...

잠도 안와서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위장 크림때문에 서로 시커먼 얼굴만 보이고. 찬바람 맞으면서 자다 깨다 자다 깨다.. 갑자기 들어선 비포장도로에 들어서니 정신이 번쩍 들고, 눈 떠보니 위장막 쳐진 포상에 105MM 견인포 6문, 위장하고 막 뛰어다니는 현역. A형 텐트, CP텐트, GP텐트.. 

그리고.... '태극기 휘날리며' 에 나왔던 105MM 견인포. 실제로 포병 주특기번호를 달고 전역했지만, 연대 행정병으로 뽑혀 군 복무하는 동안 한 번도 안만져봤던.. 간부 따라 포 수입 후 사진 찍고, 보고서 쓰기만 했던..견인포.. 전역 후 예비군 훈련에서 오히려 더 많이 만져봤던.. 그 포.. 한 번 쏘고 도망가서 다른 곳에서 또 쏴야 한다고 들었던 낡은 포..

멍하니 포 보면서 생각하는데.. 

"전원 하차!"

아까 그 싸가지 선탑자가 명령아닌 명령하고.. 얼레벌레 뛰어내리는데 아까 바지 찢어진 예비군은 "쭈아악" 하면서 더 찢어지고. 2열 종대로 줄 맞춰서 천막 들어가서 서 있는데, 갑자기 "부대 차렷" 대대장 들어오고, "대대장님께 대하여 경례" 하는데, 다들 나온 부대가 달라서 '충성' ''필승' '단결'

경례시키던 간부가 우리 죽일 듯 쳐다보는데 대대장은 '그런 거 신경쓸 때가 아니다' 라는 듯 무심하게 경례 받고. 

"전시상황이니, 간단히 말하겠다. 우리 부대는 경기도 XX 지역을 방어 및 상급부대를 지원해 작전을 펼친다. 예비군이 아닌 현역으로, 모두 죽어도 여기서 죽는다는 각오로 임무를 수행하길 바란다. 이상."

"부대 차렷, 대대장님께 대하여 경례" 하는데, 다들 뭐라고 하면서 경례할 지 몰라 눈치만 보고 쭈뼛쭈뼛 거수경례만.

대대장 나가고 나니 앞에서 경례시키던 놈이 눈에 독기품고 쳐다보면서, "...앞으로 경례 구호는 충성으로 통일, 외부에서는 경례하지 않도록 한다. 그리고 여기에 유서를 작성, 전달할 소지품이 있으면 봉투에 넣어 제출하도록. 이상." 말하고 나가는데 현역이 편지봉투랑 습기 잔뜩 머금은 종이, 모나미 똥볼펜 나눠주고.. 다들 멍하니 서 있다가 한 명이 펜 잡고 뭐라 끄적거리기 시작하니 너도나도 유서작성.

'......뭐라 써야 하나........안녕하세요...먼저 써야 하나...어머님께...? ㅅㅂ....'

한 글자도 못쓰고 있는데 옆에서 한 명 두 명...울먹울먹.... 현역때 자대배치 받고 처음으로 집에 전화하면서 울던 모습들이랑 겹쳐지고. 허접한 나무판자로 만든 책상이라 종이에 구멍이 뻥뻥 뚫리면서도 꾸역꾸역 편지 쓰는 모습에선, 보충대에서 소포박스에 편지 써 보내던 기억도 나고.. 문득 엄마 보고싶어 건빵주머니에서 구겨진 가족사진 꺼내 보는데 눈물때문에 흐릿흐릿..

딱히 뭐라 써야할 지 몰라, '나라 지키다 죽은 것이니 너무 슬퍼 마세요. 효도 못해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아들 XXX 올림' 이렇게만 쓰고 제출하고 천막 나오니 다가오는 현역.

"2개..가져가면 됩니다." 뭔가하고 봤더니 수류탄.

'ㅅㅂ...' 덜덜 떨면서 수류탄 2개 집어서 X반도에 걸어놓고. 실수로 폭발하면 온 몸이 찢겨질 거란 생각에, 숨도 크게 못 쉬고, 혹시나 떨어질까, 안전핀 빠질까 계속 지켜보고, 다시 만지작거리고, 발걸음도 조심조심.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덧 배치받은 105MM 포 앞.. 소대장이 다가와 어설프게 악수하고, "...곧 미군 부대 지원 올거야...너무 걱정말고, 아, 전포 주특기던데...실력은 어때?" 하고 물어보는데...

"전포....주특기....맞긴 맞는데......." 하고 말 끝을 흐리니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소대장.
"....주특기는 전포지만...실제 복무는 연대본부 군수과 행정병....이었습니다.....복무할 때 주특기 변경이 안돼서....." 
"....그래도 포 훈련은 받았겠지?" 하는 말에 꿀 먹은 벙어리.

"....한 번도 만져본 적 없습니다."

어이없는 표정의 소대장. 옆에서 살짝 듣던 포반장도 한숨.

"....그..그래도 예비군 훈련동안에는 방열(땅파고, 철주박고...) 하는 거 해봤습니....다...."

"....알았다." 하고 돌아서는 소대장, 포반장한테 뭐라뭐라 지시.

회사에서 일하면서도 이렇게 비참하진 않았는데. 아니, 면접 보면서도 '뭐든 열심히 잘 할 수 있습니다' 했었는데.. 아무 쓸모도 없어진 기분에 더러워질대로 더러워진 기분. 사회에서는 돈 벌면서 직급 낮은 사람 부리고 그랬는데. 답답함에 군화랑 땅만 보고..

포반장 다가오더니 친한척 어깨 주물러주면서 "...방열......중요한거니까...잘 해주세요..." 나보다 어려도 한참은 어려보이는 동생뻘한테 그런 소리 들으니 왠지 자존심도 상해 눈물도 나려고 하고, 2년간 행정병으로 따닥따닥 키보드만 만지작거렸던 생활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더 나아가 제 때 주특기변경 안해준 인사계원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

포반장이 포대원들 한 명 한 명 소개해주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하고. 그렇게 얘기하다 문득 든 생각. '미군.....언제 지원올까.....언제 도착할까......여긴 안전할까.....북한군은 어디쯤 있을까....'

간부한테 가려는 포반장 붙잡고, "..아..아까 소대장한테 들었는데 미군 지원...온다던데...언제...? 미군 오면 여긴 좀 안전해지는건가....?" 

잠시 말 없던 포반장.

"...저도...잘 모르지만....언뜻 듣기론 우리가 48시간을 버텨야 한다고 들었어요....잘...막으면."

48 시간. 2880분. 172800초. ... 

'이틀만...이틀만...그래..예비군 훈련 다시 왔다 생각하고...........참고, 살아남자...'


Ep. 4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밝아지는 주변. 그제서야 제대로 눈에 들어오는 포상, 차량,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사..언뜻언뜻 보이는 예비군. 그리고..미처 못 봤던, 한 쪽에 수두룩하게 쌓여있는 포탄들. 

'수류탄이 문제가 아니네...저거 하나 잘못 건드려서...다 터지면....' 그러면서 다시 수류탄 잘 매달려있나 확인도 하고. 시선을 옮겨 다른 포대를 보고 있으니, 진지한 분위기 속에 예비군들도 중간중간 섞여서 연습도 하고, 얘기도 하는 모습.

왠지..복잡한 마음. 제대로 알고 온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자격지심에,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라...적어도 전쟁 중에는 나보다 더 쓸모 있는 사람' 이라는 생각도 하면서, 뒤이어 밀려드는 후회. 예비군 훈련이랍시고 가서 뒤로 빠져서 휴대폰이나 만지작거리고.. 귀찮아하고, 대충하고, 숨어서 자빠져 자고..

'...하...병신...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뭐해...'

뒤돌아서 같은 포대 현역 보니, 유난히 다른 곳보다 무겁고, 어색한 분위기.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하나..어떻게 해야 하나..' 다른 예비군들, 현역을 보고 나서인지 괜히 머쓱하고, 죄인된 느낌.

어렵게 마음 먹고 한 마디.. "...괜찮을거야...음...곧 미군 온데잖아, 그리고 뭐..아직 여기까지는 못 온 거 같은데...기운들....내..고..."

아무도 말이 없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하...우...병신, 뭐라 말한거야....이 와중에...할 소리냐'

 "....예..." ...그 와중에도 부사수가 대답하니, 머쓱하게 웃으면서 괜히 총기 멜빵끈만 만지고, 

한참을 서로 말 없이 서 있는 중.. 지휘소 천막에 모여있던 포반장들이 뛰어오면서, "사격준비명령이다.." ...머리가 멍해지며 갑자기 몸을 확 감싸는 긴장감. 

'...시작...시작이구나...' 

삽, 곡괭이같은 부자재를 챙기면서 불현듯 스치는 생각. '...105...105MM..사거리...' 행정병 일하면서 수도없이 업무보고 치고, 작계를 수정하면서 알게된 105MM 포에 관해서 몇 가지 중 하나.

사거리. 10km 내외... 잠실대교 8개를 이어붙인 거리. '10km 내에 북한군이 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거리지만, 언덕 하나만 넘으면 북한군이 개떼처럼 뛰어올 것 같은 긴장감에, 심장은 빨라지고, 방탄 안은 어느새 습기와 땀으로 뒤범벅. 볼 옆으로 구정물처럼 흐르는 땀. 위장크림이 지워지는지도 모르고 이마를 닦는데, 갑자기 어수선해진 분위기.

통신병은 통신망 설치, 가설 재확인, 포차 운전병은 이미 포차 빼 놓고 주변 경계. 간부는 여기저기 무전, 측정, 명령하달. 그렇게 멍청하게 잠깐 한 눈 판 사이. 이미 화포는 하달받은 방향으로 전환되어 있고, 옆에 있던 일병 하나가 곡괭이로 땅을 파는 모습에 정신이 퍼뜩 들어 남은 곡괭이를 잡고 다른 편의 땅을 미친 듯 내리 찍는다. 책임감이라기보다, 일종의 자존심. 

'나도 군대 멀쩡하게 전역했는데, 너희보다 못 할 것 같냐. 우습게 보지마라.'

눈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을 생각도 않고 파고, 파고. 얼굴에 돌, 모래 튀는거 신경도 안 쓰면서 곡괭이질. 다음에 삽으로 흙을 퍼내면서 각 잡는데 돌에 삽 부딪히면서 불꽃 튀어오르고. 구덩이가 다 파지고, 온 몸은 땀으로 범벅. 땀에 녹아 목 언저리까지 번진 위장.. 사수 지시에 따라 포 각도 몇 번 다시 맞추고, 맞추고..

"박아" 라는 말에 발로 철주를 고정시키고 힘껏 함마를 휘두르는데. "땅!!!!" .... '...아....망했다' 급하게 박아넣으려다 빗나가 가신을 냅다 후려치고, 짜증이 났는지 '후' 한숨쉬며 신경질적으로 머리 긁고있는 몇몇 현역. 당황스럽고, 쪽팔려서 얼굴도 못 쳐다보고 사수 각도 재확인 하는 것만 곁눈질로 보고.

사수 재확인... "...괜찮습니다. 계속...." 손이 저릿저릿 하지만 철주를 다 박고, 사수 조준 완료.

사수는 포반장에게 주먹을 쥐어 조준이 끝났음을 알려주고, 포반장은 차폐각을 따고, 방열이 끝났음을 확인.. "하나포 방열끝, 전방조준점 XXX, 차폐각 XXX....." 알아듣지 못하는...그러나 예비군 훈련때마다 들었던 말..

"포탄인계" 아까 본 포탄을 들고 오는데, 부사수.. "..조심해..떨어뜨리면..다 죽는다" 멀리서 봤을때도 바짝 긴장됐는데, 바로 눈 앞에 손으로 들고 오니 괜히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

"사격 준비 완료"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잘..쏘는건가..각은 잘 조절한건가..잘못되서 터지진 않겠지..'

찰나의 순간이지만 드는 오만가지 생각과 스쳐지나가는 군 사건 사고들.. 마른 입술만 이로 뜯고, 말 한마디 없이 얼굴, 눈만 쳐다보는 숨소리도 크게 들리지 않는 순간..

그리고 잠시 후, 떨어진 발사명령. 포대원 모두 귀 막고 살짝 구부정한 자세로 "발사!!!" 

귀 막고 뒤돌아 있었음에도 귀가 조금 멍멍할 정도. 흙먼지가 날려 온통 뒤집어쓰고, 눈도 잘 뜨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도 현역들은 끊임없이 무전연락, 탄 인계. 

뒤에서 날아가는 탄을 보고, '..저정도면..다 죽겠지..? 이쪽으로 오지마라..오지마라..' K-2 꽉 붙잡고 앞의 숲만 쳐다보면서 누구든 하나 움직이면 쏴버릴 생각만 하고 있는데, 그렇게 한참 각개사격 중, 순간 들리는 "일제사격 명령입니다."

잠시 포 사격을 멈추고 전방 수기신호만 바라보는 상태. '펄럭...펄럭' 몇 번 깃발이 흔들리자, 난생 처음 보는 일제사격. 아까 사격과는 달리..몇 배나 큰 소음과 먼지.. 

'..하..' 멍하니 바라보는데.. "구경나왔어? 이새끼야!! 빨리 진지변환 준비해!!!" 간부의 호통소리. 사수, 부사수는 이미 앞쪽 철판을 접고 있었고, 맞은 편 가신에서는 철주 뽑아 정리중, 뒤에서는 이등병들이 각종 부자재를 챙겨 낑낑거리며 운반.

'..진지변환...전에 간부가 말했었는데...'
"..야, 너 왜 대대에서 한 번 쏘고 진지변환하고 그러는줄 알아? 쟤네들 아무리 후지고 그렇다지만, 포병 레이더라는게 있어.. 어디쯤 진지에서 쐈는지 알 수 있단 말이지, 쏘고 튀어야돼"

철주 다 뽑고, 가신 다리 모으고, '포차..포차에 이제 결속만 하면 돼....빨리....'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우당탕탕 소리. 위장망 줄에 걸려 이등병은 넘어지고 정리한 부자재는 다 쏟아지고. 얼굴은 흙투성이. 뒤이어 부사수의 고함 "...저 병X 빨리 안일어나!!!!" 허겁지겁 일어나서 부자재 정리하는 이등병. 나머지는 뛰어가서 위장망 핀 뽑고, 대충 묶어서 차에 싣고..

'...이제...가면 돼...가자..얼른...죽기싫어....'

언제 북한군이 올 지, 아니면 포격이 올 지 몰라서 더 불안한 상태. 금방이라도 언덕 넘어서 북한군들 바글바글 뛰어올 거 같아 주변 숲 속 뚫어지게 쳐다보고, '차 시동은 걸려있는데...' 언제 출발하는지 모르는 답답한 상황.

그런데 바로 옆 포상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놀라서 달려간 간부와 쓰러진 예비역 병사.. "....가신.....가신 발톱에 발등이 찍혔습니다......" ".........일단 이동해야 하니까 얼른 차로 옮겨!!!!!!!!"

부축받아 절뚝이면서 2돈반 차로 옮겨진 부상병.. 지휘차량을 비롯해 4/5톤 차량들도 속속 이동준비 완료. 이윽고 포차가 한대씩 빠져나가고.. '간다...간다...' 뒤에 앉은 포대원들 얼굴을 보니 한결같이 상기되어있는 표정. 

'........나나.....쟤들이나.......전쟁은...처음 겪어보는거지....'

차량 선탑자의 고함소리. "사주 경계 안해!? 정신 안차려!?" 백미러로 노려보는 간부를 보고서야 다들 '아차' 했다는 생각으로 얼떨떨하게 사주경계.

그렇게 잘 빠져나가나 싶더니, "끼이이이이이이익!!" 너나 할 것 없이 짐칸에서 모두 뒹굴 정도의 심한 급브레이크. '...뭐야...왜....' 슬쩍 일어나 앞 차를 보니 ..다들 기가막혀하는 분위기.. 차량에 연결 후, 고정핀을 끼우지 않아 포가 떨어져 나간 것.

'언제 북한애들 올 지 모르는데 아...' 순간 홧김에 "아오!!!! 가지가지한다...진짜..." 갑자기 짜증내는 모습에 은근슬쩍 눈치보는 현역. 앞 차의 선탑자. "빨리 내려서 다시 안끼워 이 새끼들아!!!!!!!' 앞 차에 앉아있던 병사들 우르르르 내려와 다시 견인고리에 결속하는데, ".....우리는? 했어!? 막내? 했어?" 아까 넘어진 이등병. 군화만 보면서 우물쭈물. "내가 했어..내가..아무도 안하길레...그정도는 할 줄 알아, 예비군 가서 자주 했었어" 다들 아무 말 없고, 차는 다시 출발.

진지를 벗어나니 긴장이 풀려 온 몸에 힘은 없고, 그래도 언제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 지 몰라 사주경계.. '어디로 가는걸까....' 물어보려다, '....안다고 달라질 거 있나'

중간중간 멀리서 들릴 듯 말 듯 '쿠구궁...' 소리. '우리가 쏘는...포 소리겠지...?...북한군은 아니겠지?' 어느덧 해는 하늘로 높이 떠, 뜨거운 햇빛을 내리쬐고, 차는 전에 있던 진지보다 훨씬 더 깊숙한 산 속으로..


Ep. 5

멀미가 날 정도로 덜컹거리며 들어가는 2돈 반.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갈수록 팔, 얼굴에 모기, 날파리는 계속 달라들고, 다리 저려서 펴주고, 주물러주고 몇 번 반복할 무렵, "내려." 한결같이 싸가지 없는 말투의 선탑 간부. '저렇게 해야 꼭 군기가 잡힌다고 생각하나' 속으로 툴툴거리며 하차.

온통 우거진 숲. 허리 높이만큼 잡초가 솟아있고, 땅에 박혀있는 낡을대로 낡은 타이어, 바닥은 비때문에 흙이 쓸려나가 울퉁불퉁, 온통 진흙밭이고, 뒤따라 내려온 포반장은 들으라는 듯 혼잣말로 "다다음주가 진지보수공사 하는 날이었는데.." '지금 이 와중에 여기까지 와서 그딴 소리 할 때냐' 하면서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때마침 "전 병력 집합" 이라는 소리에 꾹 눌러참고 집합장소로.

다 썩어서 갈라지고 푹 꺼진 타이어 위에 배 볼록하게 나온 대대장이 올라가 무언가 급한 무전을 받고 있고, 그 밑으로 간부들이 쭉 도열해있고, 뒤로는 방금 전 포격으로 한층 흥분, 긴장한 현역과 예비역들이 다들 대대장의 입과 무전기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한참동안 무전을 받더니 "예, 예, 알겠습니다. 충성" 하고 끊는 대대장. 순간 모든 간부, 병사들은 대대장 입만 쳐다보고, '말해줘..무슨 일이야..' 

몇몇 간부들과 소근소근 한참 얘기를 하더니 드디어 뒤돌아 입을 뗀다. "아.. 보는 것처럼!! 진지 상태가 좋지 못하다!! 지금 당장 작전 수행명령은 없으니, 중대장들의 통제에 따라 교대로 보수, 식사, 경계를 할 수 있도록. 이상"

우리가 쏜 포가 잘 맞았는지, 얼마만큼의 피해를 입혔는지, 지금 북한군은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따위를 말해줄 줄 알았는데. 전혀 엉뚱한 지시사항에 속이 답답해 미칠 지경.

그 때 마침, "..우리가 쏜 포는 어떻게 됐습니까? 명중입니까?" 하는 목소리. 허접한 타이어로 만든 단상을 내려오던 대대장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으려는 듯 두리번거리다, "결과는 좋다, 앞으로 질문은 해당 소대장에게 하도록" 하고 자리뜨는 대대장.

여기저기서 들리는 한숨소리, 육두문자. 간부들도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지금 중요한 건 우리가 있는 여기니까 빨리 움직여!" 

똥 씹은 표정으로 자리를 옮기니 소대장이 다가와, "우리는 먼저 진지보수를 한다, 가장 먼저 포상을 정비하고, 주변정리 후 식사, 휴식 후 야간에 경계근무에 투입된다." 짧은 대답과 별다른 질문없이 움직이는 현역들.

'야간 경계근무...? 진지변환했으면 얼른 쏘고 또 변환하고 그런 거 아닌가?...훈련을 해 봤어야 조금이라도 알지...' 아무 말 없이 그냥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현역들 보고 '그러려니' 하면서 뒤따라가고, 빠진 타이어 다시 박아넣고, 흙으로 채우고, 위장망 세우고.. 그렇게 바쁘게 일하다보니, 지금 전쟁중인지도 깜빡 잊고 서로 웃으면서 진흙던지면서 장난. 괜한 막내 이등병 괴롭히기도 하고. 전쟁상황이 아닌, 왠지 다시 예비군 훈련 들어온 느낌.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지쳐서 잠시 앉아 쉬는 중, 한참 놀던 부사수가 씩 웃으면서 다가와 내미는 수통. 피식, 웃으면서 '나도 이제 좀 같이 어울릴 수 있는건가' 입구 열고 보니 주둥이부터 녹슬어있는, 겉에는 반쯤 지워진 '동원' 글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마시는데 뜨뜻미지근한 온도, 슬쩍 베어나오는 녹맛. 두 모금 마시니 속에서 금방이라도 다 토해낼 것 같아 억지 웃음으로 '고맙다' 고 말하고.. 

반쯤 마무리했을 쯤 다른 소대와 식사교대. 아침부터 한 끼도 먹지 못해 허겁지겁 뛰어가서 식량 배급받아보니 뜨거운 물 부어먹는 전투식량. 포장 뜯어서 초콜렛 있는 거 건빵주머니에 따로 넣고, 물 받아 기다리면서 수저 받는데, 손잡이 부분이 온통 위장크림으로 덕지덕지. 

"수저가 부족합니다, 소대마다 돌려 써야해요." 마실 물도 부족한 마당에 설거지할 수 있을리는 없고, 결국 군복으로 대충 싹싹 닦아내고 먹으려고 한 숟갈 뜨는데, 물을 조금밖에 넣지 않아 그나마 밑부분은 덜 불고, 물 적게 넣은 국은 짜디 짜고. 

그렇게 먹고 있는데 옆에서 들리는 소리. "아이 씨발...진짜...뭐가문제야...미치겠네..." 슬쩍 보니 망가진 무전기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 무전병. '아까 급하다고 막 집어던지면서 챙기더니..'

슬슬 해가 떨어지면서 드는 오만가지 생각. '왜 대대장은 우리한테 아무런 얘기를 안하는 걸까...'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소대장도 별 얘기가 없고...' '...이렇게 한가하게 앉아있어도 되는건가...불안하다...'

나무에 기대서 다른 병사들 보고 있는데, 얼핏 보이는 절뚝거리는 예비군. '아까..가신에 다리 찍혔다는 애구나..덩치는 산만한데 조심좀 하지..밥 먹으러 왔구나..' 바로 옆을 지나가길레, 호기심에 자세히 보니 아는 얼굴. 

'...학교...학교로 2돈반 타고갈 때 봤던...그 안경에 여드름...뚱보....'

'아는 사람' 한 명 있다는 생각에 신기하기도 하고, 왠지 맘 한 구석이 편안한 느낌. 그러면서도 맘 한 구석에는 '아...쟤 불안하다...' 쩔뚝이면서 겨우 밥 받고 땀 질질 흘리면서 그늘진 곳 찾아 두리번거리는 왠지 측은한 모습. 두리번거리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 이쪽으로 온다. 어째..행동을 보니 나를 알아보지는 못하는 것 같아, 약간 섭섭한 마음. 

'...내가 알면 됐지 뭐...'


옆에 앉아 땀냄새 풍기고, 입술 근처에 잔뜩 음식 묻히고 우물거리면서  밥 먹는 모습이 그리 보기 좋지는 않았지만, 현역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모습이 나와 닮아 왠지 마음이 가고.. 뭐라 말 붙일게 없어, 아까 일은 못본 척 '다리 왜그러냐' 물었더니, '그냥..아까 뭐 옮기다 그랬어요' 하면서 머쓱한 표정.

피식 웃으면서 하늘을 보니, 어느 새 해는 다 떨어져 주위는 금방 어두워지고, 밤 되면 못 피울 것 같아 반쯤 부러져버린 담배 물고 피우고 있는데, 다가오는 부사수. 

"소대장님이 우리 소대 다 모이랍니다."

"...천천히 먹어요." 괜한 아쉬움에 어깨 한 번 주물러주고 일어나서 소대장 쪽을 바라보니, 뭔가 심각한 표정, 본능적인 생각. 

'뭔가 잘못됐다....'


Ep. 6

천막에 들어온 소대원. 

"다들...3..30분 후에 근무교대니까 준비들 잘 해, 실탄이랑 확인 잘 하고..이따 다시 점검하겠지만.."

다들 뒤돌아 천막을 벗어나 나가는데. 소대장에게 느껴지는 위화감이 발길을 자꾸 늦춘다.

방금 포 사격 전까지만 해도 사람좋은 모습, 억지로 어깨 주물러주던. 어림짐작해도 나와 비슷한 나이의 소대장. 지금은 잔뜩 굳은 얼굴에 어딘가 모르게 긴장되는 모습. 결국 뒤로 돌아 다시 천막으로, 결국 다시 들어와 소대장을 빤히 바라보며,

"무슨 일 있습니까...?"

뒤돌아보더니 어색하게 웃더니, "별 일 없다...나가봐."

'...거짓말...뭔가 있다.'

방탄을 벗고 이마에 고인 땀을 머리 위로 쓸어넘기고, '뭐하는건가' 하며 쳐다보는 소대장을 보며 심호흡을 한 번 한다. 

"저는... 전 포병도 아니고, 행정병이었습니다. 2년간 병사보다 간부를 많이 봐 왔고 덕분에 간부들 눈치보는 법만 배웠습니다..."

'그래서' 라는 표정으로 쏘아보는 소대장.

"이상합니다. 누구도 지금 상황을 설명 안해주고 있습니다. 뭐가 어찌 돌아가는지는 얘기해줄 수 있지 않습니까?"

"이상한 거 없어, 나가"

갑자기 초조한 마음이 들어, 무심결에 소대장의 팔을 붙잡아, "아무 말 않고 혼자 알고있겠습니다.. 하다못해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만이라도..."

서로 말없이 쳐다보길 1분여.... 뚫어지게 서로 쳐다보다 못내 고개를 돌려버리는 소대장. 다시 침묵. 몇 번의 한숨과 헛기침을 하더니. 

"...전방의 보병사단이 밀리고 있는 중이고 빠르면 내일 오후, 늦어도 모레엔 산 너머로 북한군이 몰려올거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심장이 튀어나올 듯 뛴다. 방금 먹었던 밥을 게워내고 싶을 정도의 메슥거림.

"미..미군은...?"

"..오는 중이다. 지금 위치에선 사거리도 닿지 않으니 대기하라는 사단장님 명령이다..이제 됐나?"

'왜 말하지 않았냐' 고 물으려다 입을 닫는다.

동원사단. 전시는 현역보다 예비역이 훨씬 많은 부대. 그저께만 해도 총대신 펜, 마우스를 잡고 사회에 있었던 사람들. 불과 이틀도 안 돼서 겉 모습은 180도 바뀌었지만 아직 '불안한 군인' 

위장크림때문에 피부 안 좋아진다 하던 예비군, 잠 더 안재워준다 투덜거리던 예비군, 불과 몇 시간 전..가신에 발등이 찍힌 예비군까지..

'말했으면...다 도망갔겠군...'

더이상 말 않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보병이 밀렸다면, 오늘 밤. 정찰조가 올 수도 있다."

우뚝 멈춰서 뒤돌아보고, 말없이 소대장을 찬찬히 살펴보는데 주머니에 슬쩍 튀어나온 낯익은 종이. 어제 다들 지급받은 유서봉투.

"말 안할테니 걱정마세...마십시오."

천막을 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아까와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사람들, 풍경들. 아까 하던 장난 계속 치는 소대원도 보이고, 다리 다쳤던 예비군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다 내가 보이니 씩 웃으면서 손 흔들고 있고, 짜증내던 통신병은 무전기 다 고쳤는지 혼자 늦은 저녁밥 먹고있고..

'오늘 밤...'

하늘을 올려다보니 서울보다 훨씬 많이 보이는 별. 약한 빛을 비추는 반달.

'서울에서는 하늘 보는것도 쉽지 않더만.. 전쟁 터지고서야 보네.'

무의식적으로 앞 산을 바라보니, 내일 오후면 북한군이 저길 넘어온다는 상상에 몸서리.. 생각보다 훨씬 가깝고, 크게 보이는 앞 산..

"예비역 1줄, 현역 1줄...2열 종대로 서 봐" 언제 나왔는지 아무런 표정 없이 서 있는 소대장.

우르르르 모여들어 2열 종대. 누군가 팔을 툭 치길레 쳐다보니 부사수가 씨익 웃고있고, "경계근무는 예비역, 현역 이렇게 2명이서 선다. 현역은 전에 근무서던 곳 알고 있을테니까.. 예비역들은 잘 따라가고..현역 중에 근무지 모르는 사람은 지금 말하도록."

아무도 말이 없고, "그럼 근무지로 이동, 특이사항 발생시 설치된 무전기로 연락하도록" 돌아서서 걸어가던 소대장, 발걸음을 다시 멈추더니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무표정한 모습으로 지휘천막으로 가고..

"가죠~!" 아까부터 실실 장난치면서 웃던 부사수.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아나...' 싶어 표정 굳다가도, 애써 맞춰주려 실실 웃으면서 근무지로.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 올라가는데 중간에 나오는 갈림길. 말없이 오른쪽 길로 향하는 부사수. '..왼쪽 길에는 뭐가 있을까..' 궁금하지만, 나중에 진지로 돌아와 물어보기로..

갈수록 더 앞이 안 보이는 깊은 숲. 해도 거의 다 떨어져 나뭇가지도 보이지 않아 손으로 앞을 더듬으며 걸어가고, 그 때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XXX"
"OOO"
"누구냐"
"교대 근무자"
"용무는"
"근무교대"

들릴 듯 말 듯 한 소근거리는 목소리. 그 와중에 퍼뜩 드는 생각. '나는 왜 암구어를 안 알려줬지?' 

근무 교대하면서 인수인계하고있는 부사수. 그리고 나랑 같은 예비군은 은근슬쩍 다가와. "모기 엄청 많아요~ 벌레도 엄청 많고.. 아, 무전기.. 저거 작살나가지고 한 10번 해야 1, 2번 연결될까 싶어요."

'아까 그 무전기..제대로 안 고쳤구나..'

이전 근무자는 떠나고, 좁아터진..1평도 안되는 참호에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경계 시작. 

".......무전기가 잘 안된다던데......"
"...어쩔 수 없어요, 아까 막 싣다가 그런거같아요.."

운도 나쁘다. 그 많은 무전기 중에 하필 아까 망가진..

아까 밥 먹던 무전병이 문득 떠올라 입술을 꽉 깨물며, '그 새끼는 고치지도 않고 밥 쳐먹은거구나...'

"무슨 일 생기면 어쩌지....?" 
"...에이~ 별 일 있겠어요. 앞에는 보병사단도 있고...."

한동안 그렇게 말없이 시커먼 나무, 숲 속만 바라보고, 바람에 흔들리며 들리는 나뭇잎 소리. 근처에 개울이 있는지, 아니면 얼마 전 내린 비 때문인지.. 저 앞에서 들리는 개구리 울음소리, 바로 근처에서 우는 귀뚜라미, 시도때도 없이 우는 매미소리..

조용하게 있다보니 안하고 싶어도 끔찍한 상상만 자꾸 떠오른다. 온 신경은 곤두서고, 마른 침만 삼키고, 입술은 바짝 타들어가고.. 이미 방탄 턱 끈은 땀때문에 축축해지고.. 

그런데, '툭' 어깨에 뭔가 닿는 느낌.

소스라치게 놀라 총구를 확 돌렸더니, 부사수가 놀라 엉덩방아.

"뭐...뭐야"
"아니..더우신 거 같아서 물 좀..."

바닥에는 수통이 엎어져 물이 콸콸.

"아....미안...."

부사수는 수통 줍고, 멋쩍은 듯 다시 경계근무. 괜히 미안해 할 말 없이 몇 분이 흐르고, 문득 궁금해 부사수에게 질문..

"...근데, 왜 나는 암구어 안 알려줬어?"
"아.. 모르고 있었어요? 현역들만 알려준 건가.."

'불안해서 그랬겠지..'
아까 소대장의 행동을 보니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래도 암구어는 너무하잖아.'

"나도 알려줘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 문어랑 답어 알려줘봐."
"아, 네 문어는 XXX 고 답어는....응?...."

갑자기 부사수가 말이 없고, 바짝 몸을 낮춘다. 본능적으로 나도 몸을 낮추고 전방 응시. 아까와 상황은 다른 게 없어보인다. 나뭇잎 소리, 근처의 귀뚜라미..매미..

'뭐야...왜 그래...' 하면서 부사수를 쳐다보니, 부사수가 아까보다 훨씬 작은 소리로, 

"....저 앞에서 울던....개구리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나뭇가지 밟히는 소리도.....언뜻......"

한여름임에도 갑자기 온 몸에 닭살이 돋고, 갑자기 총이 무겁게, 방탄이 차디 차게 느껴진다. 숨도 크게 쉬지 않고 숲 속만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부사수는 어느덧 다른 손으로 무전기를 들고 계속 버튼을 누른다.

'제발........지금 연결돼야해.....'

무전기를 한참 만지던 부사수. 팽개치듯 무전기를 놓고 총을 다시 고쳐잡고, 곁눈질로 슬쩍 나를 보고, '무전이.....무전이 되지 않아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제는 또렷히 귀에 들리는 '사박사박사박사박' 잔디 밟는 소리.


Ep. 7

'사박사박'

어렴풋이 들리던 소리가 이제는 제법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오늘..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

땀도 다 말라버리고, 차가워진 손. 오한이라도 느끼는지 팔에는 닭살이 돋고, 긴장 때문에 좁아질대로 좁아진 시야.. 소리가 나는 곳마다 기를 쓰고 쳐다봐도 흔들리는 나뭇가지, 잡초들만 어렴풋이 보인다.

'...부사수는...'

흘끔 쳐다보니, 다를 바 없이 한껏 긴장된 모습. 핏기없는 얼굴, 바싹 마른 입술을 이로 꾹 누르고 있다.

'..다행이다.. 혼자 여기 있지 않다는게..'

만난 지 불과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고, 몇 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으며,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지만.. 같은 군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된다.

"..보입니까? 앞에..."

부사수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왔구나..'

구름에 가리웠던 달이 다시 슬쩍 나오면서 한층 밝아진 주변. 그리고... 아른아른 보이는, 적어도 6, 7명 정도의 사람들로 보이는 검은 형체들이 느리지만 조용하게 다가오고, 

'..소대장이 말한..정찰조...헉....안돼.'
"손들....읍"

수하하려는 부사수의 입을 가까스로 막고, 검지를 입에 갖다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 조용히 머리를 들어 확인. 참호 부근의 빽빽한 나무들과 매미 울음소리 덕분인지 듣지 못한 눈치. 영문도 모른 채, 포 사격때 당당했던 모습과는 달리 반쯤 혼이 빠져나간 듯. 멍한 표정의 부사수.

"뭐..뭡니까...?"
"북한....정찰조...."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부사수가 머리를 흔들고,

"그걸 어떻게...앞에는..따로 보병사단이 있잖..."
"밀렸을꺼야..아까..소대장한테 들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머리가 복잡하게 굴러간다. '이대로 오면 발각되고, 총을 쏘면.. 다른 북한군이 여기로 올 수도 있다.. 숨을 곳도.. 없다.. 차라리 그럴 바엔..'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이 피가 나게 깨물며 부사수에게, "...신호하면...쏘자"

먼저 사격 자세를 취하니, 그제서야 상황 파악이 된 듯, 바짝 엎드린 부사수.

한 발짝, 한 발짝....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형체들..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조금 더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조금...더...'

"슥...스슥..."

큰 형체가 어느덧 제법 사람의 모습으로, 무전기로 보이는 기계도 언뜻 보인다.

눈에 들어간 땀을 다시 한 번 닦아내고, 손가락을 방아쇠에 넣고, 가장 앞서서 다가오는 형체에 정조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몇 초. '한 발만 더....'

팔이 저릴 정도로 총을 꽉 붙잡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갑자기 멈춰선 북한군. 뭔가 잘못됐다는 듯, 갸웃거리다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뭐지....?'

무의식적으로 부사수를 바라보니, 부사수도 긴장된 눈으로 나만 바라보고, 영문을 모른 채 숨죽이고 지켜본다.

'...우리를 보고 온 게 아니었어...'

조용히 소리나지 않게 총을 밑으로 내리고, 부사수도 덜덜 떨면서 다리가 풀렸는지 참호 안으로 주저앉아 버리고, 천천히..조금씩 우리 참호에서 멀어지는 북한군.

'하긴...우릴 봤으면..돌아와서 조용히 죽였겠지...' 손에 흥건히 묻은 땀을 바지에 닦고, 눈을 돌려보니 덜덜 떨면서 양 손으로 방탄을 감싸쥐고있는 부사수.

'...무전...10번에 한 번은 된다고 했는데...'

어깨를 조용히 건드리며 손가락으로 무전기를 가리킨다. 알겠다는 듯, 조용히 무전기를 들고 떨리는 손으로 버튼을 누르는 부사수.

그 사이 북한군 정찰조는 아까보다 더 멀어지고, 마지막 무전병으로 보이는 병사만 헉헉거리며 살짝 뒤쳐져있다.

"무전기...돼?"
"......안됩니다..."

'어쩐다.....어떻게 하지.....'

"그..그냥, 저 놈들 지금 눈치 못챌 때 쏴버리면 안 됩니까? 아...아니면...그냥 지나가는거 같은데..."

부사수의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를 가로젓고.. '...총소리 나면..다른 놈들이 몰려올수도 있다..그렇다고 그냥 보내면 부대가 발각될수도..'

애꿎은 엄지손톱, 입술만 물어뜯는데, 갈라진 입술에선 비릿한 피가 위장크림과 섞여 입 안으로 들어온다.

"직접 가서 말하자."

순간 흐르는 정적,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지 의심가는 눈으로 쳐다보는 부사수.

"한 명만..."

둘 다 말이 없고, 눈 앞에서 적이 왔다갔다 하는 참호를 혼자 지켜야 한다는 사실에 선뜻 누가 먼저 말을 못 꺼낸다.

"내가 남을..."
"제가 남겠습니다."

부사수가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자르고, "저보다는... 지금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제가 남겠습니다..."

조용히 몸을 돌려 전방을 응시하는 부사수.

"금방...금방 올게..."

부사수를 뒤로하고, 낮은 포복으로 숲 속을 조금씩 조금씩 기어나간다. 아직 습기가 덜 마른 땅에서 풍겨오는 낙엽 냄새와 흙냄새가 뒤섞여 올라오고, 팔꿈치와 무릎이 까져 쓰라리지만, '빨리..빨리 가야 한다.'

어느정도 벗어났다 싶어 일어나 산 길을 나는 듯 뛰어가던 중. 퍼뜩 든 생각. '암구어.....답어!'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다시 내려가는 길을 본다. '그냥..그냥 가 볼까..같은 아군인데..설마..'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젓고 다시 발길을 돌려 참호를 향한다. '현역만 암구어를 알고 있는데, 잘못하단 부대도 들어가기 전에 아군 총에 맞을 수도 있어..'

'부사수도 의심은 하겠지만..참호에서 방금 나왔고...지금 상황에서는 수하 할 수 없으니... 내 목소리는 기억하겠지...' 

최대한 소리없이, 발꿈치를 들고 다시 오르막길을 빠르게 오른다. 숨이 차고, 다리가 풀려 덜덜덜 떨리지만, 숨 고를 시간도 없는 상황. '병신같이...그걸 왜 까먹어서...' 

어느 정도 다 와 갈 무렵. 낮은 포복으로 최대한 숨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참호 윤곽이 보일 듯 말 듯한 거리. '거의 다 왔다...그 놈들은 다른 곳으로 갔을까...' 

행여나 조그마한 소리라도 날까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낙엽과 나뭇가지를 살짝 밀어내며 참호 쪽으로 포복. 

'잠깐' '아무 소리도 안들리네..아까만해도..매미가 시끄럽게...'

본능적으로 밀려오는 불안함. 말라버린 입 안에서 끈적한 침이 넘어가고, 순식간에 얼어붙은 몸. '...가...가봐야 해...나때문에 안 우는걸수도 있잖아...' 올라오는 공포감을 애써 짓누르고, 낮은 포복으로 참호 근처까지. 

"부사수.."

대답이 없다..


Ep. 8

"00초소 왜 무전연락이 안되지?"

천막을 확 걷으며 들어오는 소대장 덕분에 졸던 무전병이 깜짝 놀라 깬다.

"아..그 쪽 초소는 무전기 상태가 안 좋아서 연결됐다 안됐다 합니다."
"그럼 제대로 고치지도 않고 초소에 넣은건가?"
"아예...안되는 건 아닌데...통신장교님이...어차피 내일 금방 이동하니까 빨리 가져다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그래도........알았다"

경계근무 순서가 적힌 종이를 펼쳐 00초소 근무자를 확인, '...'그' 예비군이랑...부사수' 신경질적으로 천막을 걷고 밖으로 나온 소대장.

'00초소는..저 앞 산 가장 가까운..' 한참을 고민하던 중, 근무교대하고 들어오는 병사들 2명이 눈에 띈다.

"너희들, 장비 벗지 말고 나 따라와...아, 들어가서 통신병도 데리고 와"
"예?..어..어디로 갑니까?
"빨리 따라와, 00초소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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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작게 불렀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부사수!"

순간 주변의 수풀이 마구 짓밟히고 흔들리는 소리. 

"사박사박사박사박, 스스슥..스슥.."

5명 정도 되는 북한군이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참호 쪽으로 뛰어오고, 얼른 일어나 도망가야 한다는 마음과는 달리 덜덜 떨리며 움직이지 않는 몸. 그 사이 불과 스무 걸음 내로 다가온 북한군. 어렴풋이 보이는 살기어린 눈빛. 손에 든 칼.

그제서야 벌떡 일어나 내리막길을 나는 듯 뛰어내려간다. 한 발만 늦었어도 정찰조의 손에 뒷덜미가 잡힐 뻔한 상황. 질세라 뒤따라오는 북한군.

시커먼 어둠 속에서 나뭇가지에 얼굴과 목이 긁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험한 산길을 뛰어내려가고. 아까 봤던 살기어린 얼굴이 바로 뒤에 있을 것 같아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뛴다. 더구나,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들이 충분히 압박한다.

"사사사삭" "사박사박"

그렇게 뛰어내려오면서도 드는 생각.

'이 정도 가까운 거리인데...왜 총을 안 쏘지...?' 
'..날 잡아서 뭔가 캐내려 하는 건가..난..아무것도..모르...억!!!'

보이지도 않는 숲 속, 뾰족한 돌부리에 걸려 발가락이 불로 데인 듯 화끈거리더니, 이내 앞으로 고꾸라진다. 손 쓸 새도 없이 얼굴이 바닥에 부딪히고 뒤따라오는 찢어지는 듯한 아픔.

손에 들고 다니던 소총은 넘어지면서 떨어뜨려 보이지도 않고, 방탄 역시 턱 끈이 끊어지며 저 밑으로 굴러간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떨어졌다 생각한 북한군이 어느 새 뒷전에. 입술, 입 안이 온통 터져 끈적한 피가 목을 타고 넘어가지만 상처를 볼 여유조차 없이 다시 뛴다.

때마침 산길이 끝나고 나온 평지. '이대로 가면 부대가 나온다..그럼 살 수 있..' 그 때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내가 아는 것 딱 하나...부대위치..' 그제서야 왜 총을 쏘지 않았는지 의문이 풀린다.

'당연히 부대로 도망갈 줄 안 거다.. 위치만 알면.. 본대에 무전으로 연락하고 곧장 쳐들어오겠지..'

아이러니. 부대로 가면, 위치가 발각되어 지원이 오기 전, 기습을 당할 것이고.. 부대로 안 가자니 목숨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

'하지만, 부대로 안 가면...나는...어디로...'

그 때 부사수와 함께 올라오면서 봤던 갈림길이 보인다. '직진하면 부대가 나온다. 반대편 길은..' 막상 어디로 갈 지 답을 내리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머뭇거린다. '병신아...빨리 결정을 해...여기에서 죽을래?' 뒤에서 들리는 북한군 뛰어내려오는 소리가 판단을 재촉하고, '씨발.....' 결국 반대편 길로 냅다 달린다. 마구 뛰어내려오던 북한군 역시 뒤를 따라온다.

아까보다 훨씬 험한 길. 썩은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발목 높이만큼 쌓여있고, 한층 더 빽빽한 나무와 푹푹 들어가 박히는 진흙탕. '시간만 끌면 돼.. 교대 근무자 나오면..뭔가 이상한 걸 깨닫겠지..' 어느덧 달이 조금씩 저물고, 주변이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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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들릴 듯 말 듯 툴툴거리는 병사들을 데리고 00초소로 가는 소대장. 몇 시간 후면 날이 밝지만, 왠지 불안한 마음에 발길을 재촉한다. 한참을 걸어서 올라가는 도중, 병사의 목소리.

"저거 뭐야...? 방탄 아니야?"

야전 손전등을 조심스럽게 비추면서, 병사 하나가 흙탕물에 빠진 방탄을 집어 올린다. 뭔가 잘못됐다는 표정의 소대장.

"빨리 올라가보자"

얼마나 올라갔을까. 이번에는 흙투성이의 소총을 발견. 불안한 예상이 점점 맞아들어간다는 생각에 거의 뛰다싶이 초소로 올라간다. 그제서야 병사들도 뭔가 잘못됐다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소대장을 뒤따라 올라가고. 어느덧 도착한 초소.

"아무도 없나..?"

초소부근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보지만 아무 반응이 없다. 너무 조용해 음산하기까지 한 초소. 병사들과 함께 자세를 낮추고 초소로 들어간 소대장.

"억...."

야전 손전등으로 초소를 비춰본 소대장과 병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잔인하게 칼로 난자당한 시체. 통신병은 어느새 구토를 하고 있고, 다른 병사들은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팔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돌린다. 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찬찬히 시체를 훓어보는 소대장.

"....부사수...."
'뭔가 일이 벌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손전등을 들고 초소 근처 땅바닥을 비춰보니 온통 군화 발자국. '뱡향이..모두 한 쪽으로..'

아직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병사들을 쳐다보며, 

"정신차리고 내 말 똑바로 들어. 통신병은 당장 무전기 고치고, 고쳐지는대로 수색조 보내라고 해. 당장! 병사 하나는 여기 남아 초소를 지키고..."

남은 병사 하나를 보면서,

"넌 나 따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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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뛰었을까. 이미 다리는 풀린 지 오래지만, 그런 것 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기 위해' 뛰고 있고, 그 와중에도 끈질기게 쫓아오는 북한군 정찰조. '저것들은..지치지도 않나..'

이 와중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너희들이나 나나..목숨 걸고 뛰는거지...엇'

순간 경사진 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발을 내딛어, 산 비탈길을 따라 한참을 굴러 떨어지고, 나무 뿌리, 덩굴에 온 몸이 긁힌다.

얼마나 굴러떨어졌을까. 큰 나무에 몸이 걸려 겨우 멈춰서고, 다시 일어서려는 순간. '삐끗' 하며 다시 주저앉는다.

'발목이...이대로는 못뛰어...'

다행이 북한군 발소리는 들리지 않고, 손으로 앞을 더듬으며 최대한 소리없이 몸 숨길 곳을 찾는다.

'여기...'

큰 바위 하나가 만져지고, 결국 그 밑에 숨죽이고 주저앉는다. 그제서야 느껴지는 온 몸의 고통. 손등, 팔뚝은 온통 상처와 가시로 엉망진창. 입 안은 피 한 바가지, 얼굴은 퉁퉁 부어 눈이 잘 떠지지 않을 정도. 나무에 부딪히면서 허리도 삐끗.. 그리고, 방금 부어오르기 시작한 발목..

'...애국자 났네...누가 알아준다고...'

그렇게 몸 상태를 보다보니 갑자기 북받쳐오르는 감정. 입을 막고 소리없이 눈물을 떨구고, 불과 몇 분 전에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몇 번의 죽을 고비. '살고 싶어...누가 좀 도와줘...'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이며 눈물을 흘린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 그렇게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진정된 마음. 

때마침 시원한 산 바람이 불어오고, 갈수록 주변이 밝아진다. '시원하다...후...바람...'

그렇게 바람을 맞으며, 이성을 찾고 머리를 굴린다. 
'지금쯤이면 뭔가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을까..'
'부사수는 어떻게 된 걸까..'
'북한군은...어디로 갔을까...아직 나 찾고 있을까?'

그 때, 갑자기 목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서늘함. 산바람이 불어서 느껴지는 '시원함' 이 아닌..

'누...누구야...설...설마...'
그떄서야 정확히 감지한 서늘한 촉감의 존재.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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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내려와!!!"
뒤따라오는 병사에게 말하면서 반쯤 뛰며 내려오는 소대장. 손전등으로 바닥을 비추니, 엉망으로 찍혀있는 수많은 발자국들.

'왜 진작 못봤을까...아니...왜 마주치지 못한거지?'

한참을 내려와 부대로 향하던 중, 갑자기 끊긴 발자국들. 뒤따라온 병사는 힘에 겨운 듯, "헉....헉....소대장님 잠시만....헉...."

손전등으로 주변을 조심스레 비춰보는 소대장. 몇 발자국을 더 걸으며 확인해보고, 갈림길 쪽으로 나 있는 발자국들 발견.

'이 쪽이다...' 

때마침 저 멀리서 다가오는 수색조.

"북한군 정찰조가 이 곳을 지나간 것 같다. 아군이 쫓기고 있을 지 모르니, 신속하게 뒤따라가도록 한다."

다들 이동하려는데, 앞서 몇 발 뛰다가 멈춰선 소대장.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수색조. 

"그리고...생포는 없다...발견 즉시 사살한다."


Ep. 9

5, 6명의 북한군이 나를 둘러싸고, 그 중 한 명은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죽일 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내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떨던 몸과 손이 떨리지 않고, 마음도 담담해진다.

간부인지, 선임급인지 모를 북한군 하나가 내 앞에 살짝 쪼그려앉고, "...부대가 어디냐" 그 때 더 바짝 들이대는 칼날. '말할거면 여기로 왔겠냐...그나저나...' 다시 눈을 돌려 북한군 한 명 한 명을 본다. 다들 땀범벅에, 흙투성이의 군복, 그나마 무전기 메고 온 녀석은 툭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 하나 잡겠다고 여기까지.. 개고생했네 이것들..'

피식. "하..하하.......하...."

만신창이인 몸에, 웃을 때마다 찢어진 입 안이 욱신거리지만, 기침이 나올 정도로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북한군 얼굴이 굳어지더니 목에 칼을 들이댄 녀석과 잠시 눈이 마주치고, 칼날이 밑으로 떨어지더니 허벅지에 들어와 박힌다. 비명이 새나가지 않도록 틀어막은 손에선 이상한 악취와, 나무껍데기를 가져다 댄 듯한 딱딱하고 거친 촉감이 느껴지고, 웃음이 비명으로 바뀌고, 온 몸이 바짝 긴장하더니 정신이 번쩍 든다. 무표정한 모습으로 조용히 응시하는 북한군.

'살고싶다...'

눈 앞이 뿌옇게 변하더니 이내 눈물이 얼굴의 상처를 지나 턱 끝에서 툭툭 떨어진다.

"부대 위치를 말하라"

짧고 간결한. 북한 특유의 억양으로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그리고 코 앞으로 들이댄 비릿한 피냄새가 잔뜩 나는 칼날. 

전쟁이고 뭐고, 이대로 살아서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 몸에 흉터는 남고, 행여나 어디가 후유증이 남아 장애인으로 살아야 할 지라도.. 무엇보다, 언제 다시 칼이 내 몸에 박힐 지 모른다는 두려움.

"어...그...그러니까...."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칼날 든 북한군을 밀치고 계급 높은 녀석이 얼굴을 들이댄다.

"그러니까.."

"말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빨리 답을 듣고 싶은 듯, 재촉하는 녀석. 어느덧 뒤에서 무전기를 들고 주파수를 맞추고 있는 통신병. 긴장한 듯 사주경계 하고 있는 다른 북한군. '말하고...살자...집에 가야지...' 입을 열려는 순간. 스쳐지나가는 얼굴. 부사수.

'부사수한테 못알아냈으니.. 나한테 이러는거겠지.. 그럼.. 부사수도..'

짧은 시간, 머릿 속을 스쳐 지나가는 부사수의 모습들. 포 사격 전, 썰렁한 얘기에도 대답해주고, 진흙 던지면서 장난도 치고, 오래된 수통의 비릿한 물도 나눠마셨던 녀석. '제가 남겠습니다.' 하며 경계자세를 취하는 마지막 모습까지.

'미안하다...'

눈물 때문에 북한군이 보이지 않고, 아까보다 더 많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간다. 대답이 없자, 실망한 표정의 북한군. 그리고 연이어 다른 허벅지에 들어와 박히는 칼.

"읍!!!!"

굳이 입으로 막지 않아도, 어금니를 꽉 물으며 비명소리를 참는다.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다시 목에 칼이 들어온다. 강제로 젖혀진 고개. 그제서야 눈에 들어오는 밝은 새벽녘 하늘. 초조한 듯, 모자를 벗고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는 상급 북한군. 답답하다는 듯, 직접 칼을 빼앗아들고 들이민다. "마지막이다. 말하라"

더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는 음성. 대꾸도 하지 않고 멍하니 조금씩 밝아지는 하늘만 바라본다.

'엄마...나 죽나봐요...미안해요, 살고 싶은데...말하면...'

그 사이 이제 주변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지르며 달려드는 북한군. 밝아오는 새벽 하늘이 어느덧 북한군 얼굴이 보이며 새까매진다. 

'어디쯤 있을까...엄마...아버지...보고싶어요...보고..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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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척하고 거친 숲길을 헤치며 달리는 소대장. 그 뒤를 따라오는 수색조. 

'발자국이..여기에서 끊겼다'

두리번거리니 주위에 흔적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몇 년간 사람이 다니지 않은 듯, 쌓여있는 나뭇잎들과 나뭇가지.

"흩어져서 찾아볼까요?"

고개를 내젓는 소대장. "흩어지면 오히려 위험하다, 이미 숲 깊숙히 들어오기도 했고..."

'어디로 간 거냐...'

이미 숲 속은 손전등이 없어도 어지간한 사물은 보일 정도로 밝아진 상태. 주변을 한참 두리번거리던 소대장 시계를 보고, '곧 지원병력이 도착한다..지금 이 인원으로 산을 뒤지기에는 무리..'

"시간이 많이 지났다..부대로 복귀한다.."

긴장된 수색조원들의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지고, '살아 돌아간다' 는 안도감에 보일 듯 말듯한 웃음을 짓는 현역도 있다.

그 때. '쿵' 소리가 나더니 뭔가 굴러가는 소리.

뒤돌아보니, 비탈길에 서 있던 살찐 현역 하나가 올라오려다 미끄러져 넘어져있고, 방탄모 하나가 비탈길을 타고 데굴데굴 굴러가는 모습.

"저 병신이...빨리 줏어와!!" 

소대장의 눈치를 보던 선임병이 벼락같이 화내자 뒤뚱거리며 뛰어내려가는 현역. 정찰조도, 예비군도 찾지 못해 찜찜한 기분의 소대장이 무표정한 표정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눈으로 보고, 나머지 조원들은 비웃으며 쳐다보고 있는 와중. 갑자기 들려오는 비명소리.

"으...으악!!!"

순식간에 전원이 소총을 바짝 고쳐잡고, 근쳐 바위, 나무 뒤로 엄폐.

낮은 포복자세로 엎드린 소대장, "무슨 일이야!!!"

한동안 말이 없다가 반쯤 넋이 나가 들려오는 목소리, "시...시체...입니다..."

'설마...'

정신 바짝 차리고 비탈길을 내려가니 큰 바위 앞에서 울먹거리고 있는 현역. 고개를 돌려 바위 밑을 쳐다본 소대장. 몇 초 보지 못하고 고개를 금방 돌려버리고, 나머지 수색조원 역시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거나, 아예 몇 걸음 떨어져 주저앉는다.

오른쪽 건빵주머니에 손을 넣고 온 몸이 피로 물들어 죽은 예비군의 시신. 입술을 꽉 깨물고, 다시 눈길을 돌린 소대장.

'예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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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텐트 안.

"지원병력이 도착했다." 는 대대장의 말에 누구나 가릴 것 없이 안도하며 웃는 간부들. 유난히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흐뭇해하는 대대장. 그 와중에 유일하게 웃지 않는 소대장. 

대대장이 어느정도 눈치를 챈 듯,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이제 밀어 붙이는 일만 남았구만...아, 그나저나, 듣자하니 사망한 장병이 있다던데?"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하는 인사장교.
"아, 네.. 적 정찰조에게 당한 현역 1명, 예비군 1명이 있습니다. 정찰조에게 당한 것 같습니다."

"그래..나라를 위해 죽은 장병이니 수습 잘 하고.. 참호에서 둘 다 당한건가?"

"아닙니다. 현역 1명만 참호 안에 있었고..예비역은 그보다 훨씬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제 생각이지만..현역이 죽자 겁을 먹고, 혼자 살려고 도망가다 길을 잘못들어 잡혀 죽은 것 같습니다."

발끈한 소대장.

"그건...!!!"

일제히 소대장에게 쏠리는 눈. 무거운 분위기 속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제자리에 앉고, 뒤이어 들려오는 대대장의 목소리. 소대장을 흘깃 보며 들으라는 듯,

"전우라는게 뭔가..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죽는 거 아닌가..그런데..제 혼자 살자고..?"

...무거운 침묵.

"나중에 따로 조사하면 나오겠지..시신 수습 잘 하고. 곧 진지 이동할테니 준비하도록. 이상."

말이 끝나기 무섭게 텐트를 신경질적으로 걷어버리고 나오는 소대장. 마침 기다렸다는 듯 달려오는 의무병.

"시신 수습 마쳤습니다. 여기..소대원들 소지품.."

부사수와 예비군의 소지품이 담긴 비닐 백 2개.

"저...그런데 예비군 시신에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소대장.

"그게, 예비군 시신에..팔, 다리, 발목...등등에 자기 이름을 써 놨던데요.."

'죽었는데 별 대수냐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소지품을 받아들고  자기 텐트로 돌아온 소대장. 보관하고 있던 소대원들의 유서를 찾아 비닐 백에 같이 넣고, 유품을 한참 멍하니 바라본다.

'...'그' 예비군...'

수첩, 펜, 쪽지, 다 깨져버린 휴대폰.. 단촐한 소지품. 비닐백을 열어 수첩을 꺼내 펼쳐보니, 몇 장 안 적혀있는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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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년 00일.

2돈반에 올라 쓰고있다. 전쟁이 터졌다. 길거리엔 온통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알게모르게 비명소리가 계속 들린다. 무섭다. 정말 무섭다. 금방이라도 뭔가 날아오거나, 터질 것 같다. 사람들이 뛰어가는 반대 방향으로 내가 찬 타는 가고 있다. 갈수록 사람이 줄더니.. 이제는 차에 탄 사람 말고는 보이지도 않는다. 이 사람들을 믿고, 싸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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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년 00일

부대 들어와 누워서 쓰는 글. 아무리 맘 편하게 먹고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곰팡내나는 모포냄새, 날리는 먼지.. 다들 잠이 오지 않는 듯, 헛기침 소리와 소곤소곤 들리는 대화소리도 많이 들린다. 입대 첫 날 밤 이랬는데... 안되는 건 알지만 자꾸 휴대폰을 만지게 된다. 뺏길 것 같기도 한데.. 잘 숨겨놔야지.. 금방이라도 전원 켜면 엄마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디쯤에 있을까..엄마..아버지.. 어제 술 많이 마셨는데, 친구들은 다 군대로 들어갔을까? 00이놈은 아마 도망갔을 것 같다. 맨날 뺀질거리기만 하고, 술만 얻어마시던 놈인데.. XX얘는 잘 할 거 같다. 아는 것도 많고, 좋은 놈이고.. 다들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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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년 0X일

첫..첫 사격을 하고 2돈반을 타고 가는 길이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자괴감도 약간 든다. 함마질, 곡괭이질, 삽질..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정도밖에 안된다. 사실 아직도 손가락이 덜덜거린다. 아프기도 하고..하지만 티 내지 말아야지. 그래도 예비군인데.. 쪽팔리잖아. 그런데..아까부터 부사수 저 녀석이 실실 웃으면서 나를 쳐다본다. 친형 닮았다나..뭐라나..전쟁중에 참 맘 편한 녀석이다. 포 사격하는것도 그렇고, 몸에 수류탄 달고 다니니 '죽으면 어떻게 알아보나' 싶다. 군복에 이름 있긴 한데.. 찢어지면 보이지도 않고.. 군번줄도 없는데.. 시간 날 때 몸에다 여기저기 내 이름 써 놔야겠다. 그러면.. 어떻게 죽어도..내 이름은 알아보겠지..적어도 이름없이 땅에 묻히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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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년 0X일

점심먹으면서 여기저기에 이름을 써 놓았다. 다른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보는게 좀 부끄럽긴 하지만.. 옆에서 밥 먹는 안경 여드름 돼지..참 밥 복스럽게 먹는다. 괜히 내가 흐뭇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까와는 달리 편안하게 밥먹고 쉬는 모습이 보기 좋다. 전쟁나서 온 곳만 아니면..참 좋은 곳이었을텐데.. 그나저나 무전병은 뭐 저리 혼자 끙끙 앓는지 모르겠다. 내가 고칠 줄 알면 도와줬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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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년 0X일

경계근무 나가기 전.. 문득 오늘 죽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대장이 해준 말이 사실이 아니었으면, 그냥 아무도 안 왔으면 좋겠다. 실제로 적이 보이면 쏴 버려야 할 텐데. 내가 누군가를 죽인다는 게 상상이 안 간다. 사람 죽이면, 후유증도 있다는데..나중에 사람들 못알보면 어쩌지 싶다. 그나저나 부사수 이 놈, 참호에서 좀 혼내줄까..지금 상황은 알고 장난치는건지.. 소대장이랑 약속했으니, 얘기 할 수도 없고.. 여하튼, 꼭 살아돌아갈거다. 그래서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면서 겪었던 일 얘기할 날이 오겠지. 처음 엄마, 아버지를 처음 보면 뭐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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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수첩을 닫고, 그 때 들어오는 의무병.

"아. 저..예비군 시신..오른손에 이게 있어서 가지고 왔습니다. 사진같은데..."

얼마나 꽉 쥐었는지 보기 힘들 정도로 구겨진 피범벅이 된 가족사진. 찢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사진을 편 소대장. 사진을 한참 뚫어지게 쳐다보고, 수첩과 함께 다시 비닐백에 집어넣어 자신의 군장 안에 넣는다.

때마침 들어온 포반장.
"진지 이동 준비 끝났습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서고, 밖으로 나오니 시동을 걸어놓고 새까만 매연을 뿜으며 기다리는 포차들. 포차 뒤 좌석에 앉아 물끄러미 쳐다보는 소대원. 

차에 오르기 전 잠깐 머뭇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고, 멀어지는 진지를 백미러로 바라보는 소대장.

'약속...지켜서 고맙고...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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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시 00구 00동 XX-Y번지.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 쪽지를 쓴다.
예비군이니 아마 전쟁터에 가게 되겠지.
두렵고 힘들겠지만, 잘 싸우고 꼭..꼭 살아 돌아오너라.
평소 사랑한단 말을 못했다. 사랑한다. 아들아.

아버지가.

END
 


@ volcanic님이 쓴 본문의 내용을 읽기 편하게 "문단화"만 하였습니다.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되지만...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이다. 평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에서라면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대한민국에서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현재도 종전이 아닌 단지 "휴전" 상태에서 언제든지 다시 전면전으로 확전될 수가 있는 상황이다.

한때, "예비군이 끝날 때까지만 전쟁이 나지 말아라"라고 생각했던 나 스스로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준 글이다. 정말 어렸을 때, "엽기적인 그녀"라는 인터넷 소설을 읽어본 이후로, 이렇게 한번에 쭈욱 에피소드로 이어지는 내용을 읽어본 적이 있었던가. 그것도 이 야심한 밤에 말이다.

호전적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대한민국 땅에서 "전쟁을 망각"하는 순간, 다시 전쟁은 터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말 불행하게도 그렇게 전쟁이 일어난다면, 자원입대하는 사람의 한명으로 전쟁터에 나서야겠지. 그것이 비록 예비군이 끝났다고 하더라도, 나라를 지켜야 하는 것에는 나이도 성별도 구분이 없으니까.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결국 그 나라를 지켜내는 것은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일 테니까.

야심한 밤에, 마치 군입대 때의 느낌과 훈련 때의 느낌을 살려주면서 눈시울을 붉게 했던, 그리고 어머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들게 했던, 좋은 글을 창작한 volcanic님에게 늦었지만 감사의 말을 전한다.

 
★ 참고 사이트

1. 일간베스트저장소, 
이름실명써야되냐님 작성글, "역대 일베 썰 best 4 뽑아봤다.Best SSul (and 유입 걸러내기)"
2. 일간베스트저장소, volcanic님 작성글, "
전쟁발발, 예비군 1 (수정,브금)"
3. 일간베스트저장소, volcanic님 작성글, "전쟁발발, 예비군 2 (수정,브금)"
4. 일간베스트저장소, volcanic님 작성글, "전쟁발발, 예비군 3 (수정,브금)"
5. 일간베스트저장소, volcanic님 작성글, "전쟁발발, 예비군 4 (수정,브금)"
6. 일간베스트저장소, volcanic님 작성글, "전쟁발발, 예비군 5 (수정,브금)"
7. 일간베스트저장소, volcanic님 작성글, "전쟁발발, 예비군 6 (수정,브금)"
8. 일간베스트저장소, volcanic님 작성글, "전쟁발발, 예비군 7 (수정,브금)"
9. 일간베스트저장소, volcanic님 작성글, "전쟁발발, 예비군 8 (수정,브금)"
10. 일간베스트저장소, volcanic님 작성글, "전쟁발발, 예비군 9 END (수정,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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